top of page
검색

팔달문op 팔달문오피 남문오피 남문op

  • suwonopss
  • 2021년 12월 21일
  • 9분 분량

최종 수정일: 2021년 12월 22일

팔달문op 팔달문오피 남문오피 남문op



팔달동(八達洞)


⊙ 감천 약수터 밤떡


팔달 공원에 있는 약수터이다. 지하수를 이용한 것으로 1989년에 설치되었다.


⊙ 강감찬 장군 동상(姜邯贊將軍銅像)


팔달산 중턱에 있는 강감찬 장군의 기마 동상(騎馬銅像)이다. 남창동 산 1­1번

지 팔달 공원 동쪽 기슭에 있다. 1971년 6월 29일 애국 조상 건립 위원회(愛國祖

上建立委員會)와 서울 신문사가 공동 주관하여 기공한 것으로, 1972년 5월 4일

제막식을 거행하였다. 일부 지관(地官)들은 이 자리가 최고의 명당 자리라고 한

다. 강감찬 장군 동상 뒤쪽에서 테니스장 사이에 음택(陰宅)의 명당(明堂)이 있

다는 것이다. 이 곳은 땅의 기운[地氣]이 너무 강해 소나무 잎도 다른 지역의 것

보다 강하고 윤이 난다고 한다.


⊙ 공동 우물·공동 새암


영동 시장 근처에 있었던 우물이다. 현 팔달문 오른쪽 시민 백화점 자리에 있

었다. 조선 시대에 만들어져 인근 주민들의 공동 식수원이 되었던 곳으로,‘공

동 우물’또는‘공동 새암’이라 불렸다고 한다. 도로 정비와 복개 공사로 인해

지금은 그 흔적도 찾을 수 없다.


⊙ 거북산·구산(龜山)·구봉(龜峰)·구암(龜巖) 떡집


팔달문 밖 영동 시장 근처에 있었던 산이다. 구천동 10­44번지 일대이다. 현재

중동 사거리에서 신갈 방향으로 난 원천로와 녹산 빌딩 등이 들어서 있어 그 자

취를 찾아볼 수가 없다. 다만 거북산당이라는 당 이름을 통해 그 자취를 살필

수 있을 뿐이다. 문헌 기록이나 옛 지도를 보면 ‘거북산’은‘구산(龜山)’,

‘구봉(龜峰)’등으로 불리었음을 알 수 있다.


화성성역의궤 권2 101면에 보면,“남수구(南水口)의 구산돈대(龜山墩臺)”라

나와 있어 남수구 근처에 거북산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 정조 18

년 1월 15일 자에는,“인하여 용연에 나아가 구봉(龜峰)을 가리키면서 심태에게

이르기를‘오른쪽은 구봉이고 왼쪽은 용연이어서 거북과 용이 서로 마주하고 있

으니 그 이름 역시 우연하지 않다.’하였다.”라는 정조의 언급이 나와 있다.


이로 보아‘거북산’은‘구봉’이라 불리었으며, 용연 맞은편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추정은 1872년(고종 9)에 그려진 수원부지도(水原府地圖) 를 보

아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지도를 보면, 용연과 마주하는 위치인 남문 밖 시장 근

처에 구산이 그려져 있다.


수원 추팔경(水原秋八景) 중에는 구암반조(龜巖返照)가 있는데, 이는 저녁빛

이 찬란하게 비치는 구암의 경치로 수원 추팔경의 제4경에 해당한다. 그런데 여

기서 말하는‘구암’이 바로 거북산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 거북산당·거북 도당·당집


영동 43­2번지에 있는 제당(祭堂)이다. 팔달문 바로 아래에 위치한 영동 시장

내 서울 은행 뒤쪽에 있다.‘당집’,‘거북 도당’등으로도 불린다. 당 이름에

‘거북’이 사용되는 이유는 이 제당이 지금은 사라진 거북산[龜山·龜峰] 기슭

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라 한다.


또한 거북은 물을 상징하는 것이기에 불을 제압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믿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실제로 시장 사람들은 당제

를 지내지 않으면 시장에 불이 잘 나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더라도, 당제는 꼭

올려야 한다고 믿고 있다. 한동안 당제 경비가 없어서 큰 굿을 하지 못한 적이

있었는데, 시장에 불이 나고 문제가 생겨서 부랴부랴 제수(祭需)를 차리고 당굿

을 해서 액을 막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지금도 시장 번영 회원들을

중심으로 매년 음력 10월 7일에 제물을 차리고 굿을 한다.


거북산당이 처음 생겨난 시기는 대략 18세기 후반으로 보고 있다. 즉, 1789년

(정조 13) 사도 세자(思悼世子)의 화산(花山) 이장이 결정되고, 수원부 읍치가

팔달산 기슭의 신기리로 옮겨지고 마을과 시장이 형성되면서부터, 이 곳에 터주

가리 형태의 제당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현재의 당 건물을 짓기 전에는 우

묵하게 된 땅에 짚주저리로 당 터주가리를 만들고, 그 안에 하얀 기를 넣어둔 형

태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매우 큰 연못이 있었는데, 이 연못가에 거북처럼 생

긴 돌이 자리하고 있었다고 한다. 현재의 당 건물은 1960년 지동에 살던 백윤남

할머니가 사비(私費)를 들여 당집을 짓고,‘거북산당’이라는 이름까지 붙였다

고 한다.


거북산당에서 행해지는 당굿은 현재 무당 오수복에 의해 거행되고 있는데,

1990년 10월 ‘거북산당 도당굿’이라는 이름으로 무형 문화재 제98호로 지정받

았다.


⊙ 남문성꿀 수원오피


팔달문 안에 있는 옹벽을 말한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남문이라고도 불

리는 팔달문 안 옹벽 틈에서 겨울이 되면 꿀이 흘러 나와서 근처의 사람들이 꿀

을 찍어 먹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까닭으로 이 옹벽을‘남문성꿀’이라

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아마 당분(糖分)이 들어있는 돌이 옹벽의 재료가 되어

서 생긴 현상으로 보인다.


⊙ 남창교 표석


팔달구 팔달동 109―95번지 앞 도로에 있는 표석이다. 남문 사거리 백병원 옆

골목 모퉁이에 대로변을 향해 서 있다. 팔달산 영산 약수터 계곡에서 흘러내리

는 샛또랑(남창하천)과 팔달로가 만나는 지점에 남창교가 있었다. 원래 돌 다리

였던 연유로 남창교를‘샛또랑 돌 다리’라고도 불렀다. 이후 도로가 확장되면

서 다리는 없어지고,‘南昌橋(남창교)’라 쓰여진 표석만 남아 있다.


⊙ 대한민국 독립 기념비


팔달산 정상에 있는 기념비이다. 현 팔달로 3가 산 1­1번지이다. 1948년 8월 15

일 수원군내 학생 및 읍민 일동과 유근홍, 이상훈 등이 주축이 되어 세웠다. 독

립의 위대한 민족의 정기를 후손에게 이어주고자 세운 기념비이다.


⊙ 도화동


팔달동에 있었던 마을이다. 남문 로타리에서 종로 방향에 있었으며, 현 백내

과 병원 뒷편 지역이다. 도화동이라는 이름은 복숭아꽃이 많이 피었다는 데서 유

래한 것이라 한다.


⊙ 뽕나무밭·뽕나무밭머리


팔달동 93번지 일대에 있었던 밭이다. 현재 팔달동 사무소 주변으로 예전에 뽕

나무밭이 있어서, ‘뽕나무밭’또는‘뽕나무밭머리’라고 불린다.


⊙ 3·1 운동 기념탑


팔달산 서남암문 옆에 있는 기념탑이다. 수원의 독립 운동을 기념하여 세운 것

이다. 그 오른쪽에는 해방 직후 화홍문 옆 중포산에 세워졌던 구비(舊碑)도 이

기념탑 옆에 옮겨 놓았다.


일제 강점기 당시 수원면에서 처음 만세 운동이 일어난 것은 3월 1일 화홍문에

서였다고 주장을 하기도 하지만, 구체적인 정황이나 증거가 미약하다. 지금까지

의 연구를 바탕으로 할 때, 3월 16일에 벌어진 만세 운동이 처음으로 알려져 있

다. 그 날은 장날이었는데 팔달산 정상에 있는 서장대와 창룡문쪽 연무대에서 각

각 수백 명이 만세를 부르며 종로를 향하여 행진을 했다. 그후 3월 23일에는 수

원역 근처 서호에서 약 7백명이 시위를 벌였고, 3월 25일에도 25명의 청년학생들

과 노동자들이 시장에서 독립 만세를 외쳤다. 그리고 3월 25일에 있었던 시위

주동자의 검거에 대한 항의 표시로 3월 27일에는 인근 상인들이 상점 문을 닫는

철시(撤市) 투쟁을 감행하기도 했는데, 이 때 약 40%에 달하는 상점이 문을 닫았

다고 한다. 3월 28일에도 30여 명이 독립만세를 불렀고, 3월 29일에는 수원 기생

조합의 기생 약 30명이 자혜 병원 앞에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 날 밤에는 상

인과 노동자들까지 합세하여 독립 만세를 불렀고, 일본인 상점에 돌을 던지는

등 그 기세가 대단하였다고 한다.


⊙ 수성 약수터


팔달 공원에 있는 약수터이다. 지하수를 이용한 것으로 1989년에 설치되었다.


⊙ 수원면사무소 자리·수원읍사무소 자리


현재 팔달로 2가 남진 상회가 자리하고 있는 지역과 그 주변 일대이다. 본래

이 자리는 수원면사무소였다가 1931년 수원이 읍으로 승격되면서 읍사무소로 바

뀌었다.


⊙ 시구문·시구문턱


팔달로 3가 영동 시장 쪽에 있던 문이다. 팔달문 동쪽 200m 지점에 있었다. 옛

날 성안에서 부정하게 죽거나 전염병 등으로 죽은 이들의 시체를 성밖으로 옮길

때 이용하던 문이어서 ‘시구문’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시구문턱’이라

고도 부른다.


⊙ 십자가(十字街)·십자로(十字路)


장안문과 팔달문을 잇는 남북 도로와 창룡문과 화성 행궁에 이르는 동서 도로

를 말한다. 남북 도로와 동서 도로가 직교한 형태가‘열 십자[十]’를 닮았다 하

여‘십자가’라 이름지어 졌다. 화성성역의궤 에는‘십자로’라 나와있다.


18세기 말 새로운 상업 중심 도시로 탄생된 수원은 여러 점에서 종래의 도시들

과는 달랐다. 상업이 활발한 새 도시다운 면모가 두드러졌는데, 수원의 중심부

를 이루는 십자가가 그 중 하나였다. 수원부의 중심을 관통하는 주 도로는 장안

문과 팔달문을 잇는 남북 도로였다. 그리고 이 남북 도로의 중간에서 도로를 직

교하여 서쪽으로는 얼마 가지 않아 부의 관아인 화성 행궁 정문으로 이어지고 동

쪽으로는 창룡문에 이른다. 십자가란 바로 이 남북 도로와 창룡문에서 행궁으로

이어지는 길이 직교하는 도로의 이름이다.


조선 시대에 지방 도시는 물론이고 서울에서도 동서남북이 교차하는 직교 도로

는 쉽게 볼 수 없다. 그런데 수원의 도로 중심부 명칭을 십자로로 명명한 것은

자급자족을 원칙으로 하는 중세적 도시의 발상과는 전혀 상반된다. 여기에는 사

통팔달의 이념이 담겨있다. 비록 동서남북으로 도로가 완벽하게 관통하고 있지

는 않지만, 십자로를 둠으로써 그 정신을 실현하고 있는 셈이다.


수원의 사통팔달의 정신은 동서남북 네 방향에 문을 낸 사실에서

도 드러난다. 다른 지방 읍성이 대개 동문, 서문, 남문의 세 방향의 문만을 둔

데에 비해, 화성에는 네 방향의 문을 낸 데에서, 사통팔달의 정신이 담겨있는 것

이다.


십자로가 동서남북으로 완벽하게 관통되지 못한 것은 서쪽에 주산(主山)인 팔

달산이 있고, 또 서쪽 방향 도로의 정점에 관아와 행궁을 두었기 때문이다. 이러

한 이유로 인해서, 십자로는 한번 꺾여서 화서문으로 연결된다.


⊙ 아흔 아홉 칸 집터·양승관 가옥


팔달산 아래 남창동에 있던 일제 시대 수원 제일의 갑부(甲富)로 꼽히던 양승

관의 집터이다. 1960년대 중반에 나온 도시 계획 원도(都市計劃原圖) 를 보면,

남창 초등학교 북쪽 남창동 95번지 일대가 이에 해당한다. 일제 시대에는 일본

수비대가 수비대 본부로 사용했다. 이 집의 규모는 건평이 275.12평에 이를 정도

로 매우 크다. 18세기 중반기 건립된 이 집은 1973년에 용인 민속촌으로 옮겨졌

고, 현재 이 지역은 다른 집들이 들어서 있다.


⊙ 야시장(夜市場)


팔달문에서 지금의 수원 극장 앞까지 대로변에 있었던 시장이다. 야시장은

1934년에 생겼는데, 일제가 기존 상권(商權)을 거의 장악한 이후, 시장도 늘리

고 한국인 상인들의 숨통을 터주기 위한 목적으로 만든 것이다. 김형기, 에구치

(江口) 등 10여 명이 발기하여 시장을 열었는데, 당시 일본인들이 거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본이 영세한 우리 상인들의 참여가 높았다고 한다.


⊙ 영동 시장(榮洞市場)


팔달로 3가 영동 9번지 일대에 있는 시장이다. 팔달문 동쪽 남문로 남쪽변에

있다. 옛날부터 문밖 시장, 성외 시장 등으로 불리며 4일 9일에 장이 섰던 수원

의 장터였으며, 곡식 시장(싸전)이 활발하였다. 수원의 대표적인 장터로서, 2~30

리 밖에서도 이 장터를 이용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붐비는 곳이었다. 이 시장

을 중심으로 고을이 커지자 상업이 번영하라는 뜻으로 일제 강점기에‘영정 시장

(榮町市場)’이라 하였다가, 1949년 수원시로 승격이 되면서‘영동 시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이 장터에서는 옛날 인간 저울의 역할을 했던 마광구라는 인물의 이야기가 전

해온다. 옛날에는 저울이 없어서 사람이 직접 무게를 달아 계산하곤 하였는데,

이 때 마광구라는 사람이 인간 저울로 유명했었다. 그는 되에 담은 쌀을 가늠하

는 저울 역할을 하였는데, 너무도 정확하고 분명하여 그 당시 장터에서 유명 인

물로 손꼽혔으며 타 시장에도 뽑혀나갈 정도로 유명했다고 한다.


영동 시장에는 200년 전부터 상인들의 번영을 위해서 지내오는‘영동 거북산

당 도당굿’이 전해오고 있다. 이 도당굿은 남무(男巫)인 이용우(李龍雨)가 맡아

왔는데, 그가 죽은 이후 무녀(巫女)인 오수복이 승계하여 맡고 있다.


⊙ 영산 약수터


남창동에 있는 약수터이다. 남창동 산 1­1 번지에 있다. 주변 지형은 자연 동굴

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옛날 부터 효험이 있다고 믿어져서, 관직에 나가려는 자

나 국회의원 출마자 등 중대사를 앞둔 사람들이 정성을 들이는 장소였다고 한

다. 물맛이 좋아 현재까지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다.


약수터 곁에는 천막이 쳐져 있는데 인근 절에서 칠성각으로 사용하고 있다. 원

래 약수는 이 천막집 뒤에서 나오는 것을 이용했었다

고 한다.


⊙ 읍사무소 마당


팔달로 2가에 있었던 옛 터이다. 수원읍 시절 읍사무소 앞에는 넓은 마당이 있

었고 그 아래쪽에는 읍장의 관사가 있어서 민원인들이 많이 드나들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였다고 한다. 명절 때에는 이 마당에서 윷놀이 판이 벌어졌다

고 한다. 현재 남신 상회가 자리하고 있는 일대이다.


⊙ 종로(鐘路)


구 중부 경찰서에서 종로 사거리를 거쳐 매향교에 이르는 총 연장 250m의 도

로와 그 주변에 형성된 거리이다. 화성 축성 후 이 일대는 서울의 중심지인 종루

(鐘樓)와 같이 번화한 모습을 보여서, 수원의 중심지라는 의미로‘종로’라 하였

다 한다. 이 지역의 번화한 모습은 이희평(李羲平)이 쓴 화성일기(華城日記)

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화성일기를 보면,“문을 들어서니 임금님 거둥길 좌우로 여염(閭閻) 집이 촘촘

히 붙어 있는데, 서울 재상들의 집과 같은 집들이 많고 붉은 대문의 분장이 빛나

니 한양과 다름이 없고, 종루(鐘樓)의 십자로에 있는 시장이 문을 열어, 상인들

이 앉거나 선 모습이 한양의 종루와 같더라. …(중략)… 종루에 나가 거닐며 보

니 시정 여항의 번화함이 비할 데 없고, 길 위 큰 개천을 쳐 정제(整濟)히 하였

으니 광통교(廣通橋)와 다름이 없더라. 이전에 이 땅은 세류 주막거리인데 옛 수

원 땅에 원침(園寢)을 모신 다음에 이리로 읍내를 옮겼으니 여기는 땅에 습기가

없고 흙이 메말라서 깨끗하고 산천이 아름답고 새뜻하여 이전에 관청이 있었던

것 같더라.”라고 되어 있어, 당시 수원 중심지로서의 종로 모습을 가늠해 볼

수 있다.


⊙ 팔달 공원(八達公園)


남창동 산 1­1번지 일대에 있는 공원이다. 1970년대 이후 조성된 공원으로 총

면적은 522,280㎡이며 잔디 면적은 23,500㎡이다. 주요 시설물로는 1.2㎞의 성

곽, 순환 도로 3.2㎞, 강감찬 장군 동상, 3·1 운동 기념탑, 효원의 종, 홍난파

노래비, 약수터, 체육 시설 등이 있다.


⊙ 팔달문 동종(八達門 銅鐘)


팔달로 2가 팔달문 2층 문루에 있는 종이다. 원래 1687년(숙종 13)에 화성군

동탄면 만의사(萬儀寺)에서 만들어져 봉안(奉安)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높이

123m, 지름 75cm의 커다란 종으로, 전형적인 선종(禪鐘) 양식을 취하고 있다. 17

세기 후반의 사실적인 범종 양식(梵鐘樣式)을 잘 갖추고 있는 대표적인 종으로

꼽히고 있으며, 생동감 넘치는 종뉴(鐘紐)는 조선 후기 조각을 엿볼 수 있는 좋

은 사례가 된다. 1976년 8월 27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69호로 지정되었다.


해마다 화홍 문화제(華虹文化祭) 전야제 날 28번 타종(打鐘)하고 당일 아침에

33번 타종하는 행사를 치루어 왔으나, 타종할 때 마다 생기는 심한 진동 때문에

문루의 손상을 우려하여, 1993년부터는 효원의 종을 새로이 마련하여 타종 행사

를 거행하고 있다.


⊙ 팔달사(八達寺)


팔달동 115번지에 있는 절이다. 남문에서 팔달산 방향의 로얄 극장 옆 도로변

에 있다. 1917년 윤흥자 스님이 포교를 위하여 건립하였다고 한다.


⊙ 팔달 약수


팔달산 남쪽 팔달 공원 도로변에 있는 약수터이다. 물이 깨끗하고 물맛이 좋아

서, 팔달산을 찾는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다.


⊙ 한데 우물·공동 우물


중부 경찰서 남쪽에 있는 옛 우물터이다. 남창동 72­2번지 지역에 있다. 수원

군 시절 주민들의 식수원으로 수원군에서 세비를 들여 팠다고 한다. 관리인도 없

고 주변에 아무 것도 없어서,‘한데 우물’이라 부른다고 전해진다. 아무리 가뭄

이 들어도 마르지 않고 물의 양이 동일하였다고 한다. 인근 남창동, 신풍동, 남

수동 등의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사용했던 우물이어서,‘공동 우물’이라고도

부른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지만, 아직도 그 형태가 남아있다.


⊙ 홍난파 노래비


수원 출신의 음악가인 홍난파(1898 ~ 1941)를 기리는 비이다. 팔달산 공원내

남포루 아래에 있다. 난파가 태어난 지 70돌이 되는 해인 1968년 10월 15일에 세

워졌다. 홍난파의 본명은 영후(永厚)이다. 대표작으로는 봉선화 , 성불사의

밤 , 옛 동산에 올라 , 봄처녀 등 민족적 정서가 담긴 노래와 낮에 나온 반달 등

의 동요가 있다. 작품집으로는 조선 동요 100곡집 , 바이올린 독주곡 등이 있

다. 바이올린 연주자, 작곡가, 지휘자, 음악 교육가, 음악 평론가 등 다방면에

걸쳐 큰 역할을 하여, 한국 양악사(韓國洋樂史)에서 가장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

물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말년의 친일 행위로 인하여 후대로부터 비판을 받

고 있기도 하다.


⊙ 화춘옥(華春屋)


영동 시장에 있었던 음식점이다. 이 음식점은 수원의 향토 음식인 수원 갈비

를 전국적으로 알리는데 일조했다. 1940년대 남문 밖 시장(지금의 영동 시장) 싸

전 거리에서 화춘 제과(華春製菓)를 경영하던 이귀성(李貴成) 씨가 해방이 되면

서 영동에 2층 목조 건물을 사서 화춘옥이라는 간판을 걸고 음식점을 시작한 것

이 시초이다. 처음에는 해장국이 전문이었는데, 다른 집과는 달리 소갈비를 푸짐

하게 넣어주었기 때문에 영동 시장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

이후 1956년부터 양념 갈비를 구워 팔기 시작하였는데, 그 맛이 일품이어서 수

원 전역에 소문이 났다. 화춘옥의 갈비는 갈비대가 크고 양이 많은 것이 특징이

어서, 갈비 판매로는 이익이 남지 않아 다른 음식을 판 수익으로 그 손해를 보충

했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이후 화춘옥은 아들 이영근(李榮根) 씨가 이어

받아 경영을 맡게된 이후로, 전국적으로 소문이 나서 언론에 소개되었고, 박정

희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고관들이 직접 다녀가는 등 그 전성기를 누린다. 하지

만 1979년 화춘옥은 없어지고 그 자리에는 수원 쇼핑이 들어서게 된다.


그러나 이 때를 전후해서 수원 지역에는 화춘옥 갈비의 맛을 근본으로 하되,

각자 독특한 맛을 내려고 애쓰는 갈비집들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고, 1995년부터

는 수원 갈비 축제라는 독특한 음식 축제를 개최하여 수원 갈비의 전통을 잇는

동시에 국내외에 수원 갈비의 맛을 알리고 있다.


⊙ 효원 약수터


팔달 공원내 강감찬 장군 동상 옆에 있는 약수터이다. 수원 로타리 클럽 창립

20주년을 기념하여, 새마을 훈장과 함께 받은 상금과 사재 등 총 2,000만원을 재

원으로 하여 1986년 7월에 만들었다.


⊙ 효원의 종


남창동 산 1­1번지 팔달산 정상에 있는 종이다. 유서깊은 효원(孝園)의 도시이

자 날로 발전하는 수원의 모습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그 동안 주요 행사 때마다

타종하였다. 경기도 유형 문화재 제69호인 팔달산 동종이 300여 년이 경과하여

낡았을 뿐만 아니라, 그 규모가 작고 소리가 탁하여 울림이 없어 더 이상 타종

할 수 없는 한계에 이르러, 1991년 11월 4일 주조 추진 위원회를 구성하여, 1여

년만에 완성하였다.‘효원의 종’이라는 이름은 시민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정해

진 것이다. 이 이름에는 수원 시민들에게 효행심을 심어주고 영원한 화합과 진전

을 다지는 한편, 선진 시민상을 구현함으로써, 온 시민이 한마음을 이루는 구심

점으로 작용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다. 종의 전면에는 시의 상징물인, 은행

나무, 철쭉, 비둘기 등과, 화홍문을 위시한 화성의 주요 문화재 등이 새겨져 있

다. 구경 2.15 m, 높이 3.54 m, 총 중량 3,300관(약 12.5톤)에 이르는 대형종이

다.

 
 
 

Comments


500 Terry Francois Street

San Francisco, CA 94158

info@mysite.com

 

Tel: 123-456-7890

  • Black Facebook Icon

Mon - Fri: 7am - 10pm

​​Saturday: 8am - 10pm

​Sunday: 8am - 11pm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