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통오피 영통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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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통동(靈通洞) 밤떡
영통동은 본래 수원부 장주면에 속한 곳이었다.
1899년에 발간된 『수원군읍 지』에 ‘영통(靈通)’이란 명칭이 보인다. 1914년 4월 1일 일제에 의한 수원군 의 동리 명칭 및 구역 변경 때 그대로 영통리라 하여 태장면 관할이 되었다. 1949년 8월 15일 수원읍 지역이 수원시로 승격되었을 때 화성군 태장면으로 편제 되었다. 이후 1963년 1월 1일 법률 1175호로 태장면과 안룡면의 일부 지역이 수 원시로 편입되고, 태장면과 안룡면의 나머지를 통합하여 태안면(台安面)이라 고 쳐 부르게 되는데, 이 때에 이 지역은 태안면에 속하게 된다. 1994년 12월 26일 대통령령 제14434호에 의하여 일부 지역이 수원시로 편입되 어, 같은 날 수원시 조례 제1931호로 망포리, 신리를 포괄하는 법정동이 되었 다. 그리고 1995년 4월 20일 대통령령 제14629호에 의하여 화성군 태안읍 망포 리 일부가 또 편입되어 같은 날 수원시 조례 제1953호로 팔달구 망포동과 신동 이 신설되고, 수원시 조례 제1955호에 의하여 망포동과 신동은 매탄 3동의 관할 로 들어가게 된다.
영통이라는 동 이름은 이 지역의 고유 이름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영통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신령스러운 것과 연관이 있다는 여러 이야기가 전한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 지역의 지형이 염통처럼 생겼다고 해서 염통 또는 영통이라고 불렀다고 전해지기도 하며,
이와는 달리 청명산 정상에 있었던 절에 고려시대의 보물이 묻혀 있었는데 그 보물이 영험스러운 물건이라 신령스러운 기운이 감돌아 영통이라 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또한 안영통에서 뒷골로 넘어가는 구렁골 고개에서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나타났다가는 금방 사라지고, 보였다가 없어지기도 하여 동네 사람들 보두가 산신령이 나와서 돌아다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영(靈)과 통(通)하는 곳』이라 영통이라 불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신나무실 떡집
열병합발전소 서남쪽 지역에 있었던 마을로서 옛날에는 장죽 또는 신촌이라고도 하였다. 『신나무실』이라는 이름에서의 『신(莘)』자는 개나리 신자로 예전에 이 지역에 개나리가 많았던 연유에서 유래한 것이라 전해지고 있으며,
1980년대에 들어와 개나리가 동네나무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또한 이 마을은 탐진 최씨 부호군파가 대대로 살아온 집성촌이었으며, 현재는 신성.신안.쌍용.진흥.주공.동보.신명.극동아파트등이 조성되어 있다.
벽적골 수원오피
영통972번지에서 973번지 일대로 신나무실 아래쪽(남쪽)에 있었던 마을이다. 벽적골이라는 이름은 여주에서 이준한 사람들이 이 곳에서 벽돌을 구워 가면서 살았다고 해서 벽적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현재는 주공.삼성.태영.두산.우성.한신아파트 등이 입지하고 있다.
살구골
영통 988번지에서 989번지 일대에 있었던 마을로써 살구나무가 많았던 마을이라서 살구나무골 또는 살구골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하며, 현재는 진덕.서광.성지.동아아파트와 현대아파트가 조성되어 있다.
독침산.독지미산
열병합발전소 뒤쪽(동남쪽)에 있는 해발 109M의 산으로 청명산에 비하여 낮고 완만한 경사면을 이루고 있다.
현재 산의 정상에는 영통 신시가지 조성을 기념하는 팔각정인 영통정이 건립되어 있으며, 주변에는 운동기구가 설치되어 있고 산을 오르기도 편하여 많은 주민이 찾고 있다.
당시 뱀이 많아서 독침산이라 부른다는 유래가 전해지고 있으며, 일명 독지미산이라고도 부른다.
말티고개
영통 손실에서 서천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말티고개"라는 이름은 손실에서 살던 손씨들이 기르던 말들의 발굽을 이 곳에서 달았기 때문에 붙여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손실에서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손씨들이 이 고개의 높이를 낮추고 길을 넓혀서 망했다고 한다.
방아다리
영통 방죽골 아래쪽(남쪽) 지역에 있었다. 예전에는 이 곳에 방앗간, 정미소 등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모두 사라졌다.
방죽골
영통 신나무실 서쪽에 있었다. 1950년대 태안평야의 수리(水利)시설 확충을 위해 신나무실의 비교적 낮은 지역인 이 곳에 방죽을 쌓고 저수(貯水)하였던 데서, 이러한 지명이 생긴 것이라 한다.
방죽거리 . 망포 . 원망포
태장초등학교 남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조선 중엽에 이 곳에 방죽을 쌓았는데, 이 마을이 커다랗게 쌓은 방죽 근처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방죽에서 흘려보낸 물이 쭉 흘러나오다가 이 부근에서 우측으로 돌아나가게 되는데, 이 곳이 물길에 머리를 쳐든 형상이라 해서 "방죽머리"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1914년 방죽머리를 중심으로 근처에 있는 당암(堂岩), 우문(牛門)을 합하여 망포리라 부르게 되었는데, 이러한 연유로 "방죽머리"를 "망포" 또는 "원망포"라고도 부른다.
상부고개 . 상부고개마을
신갈고속도로 인터체인지 진입로에서 황골로 들어가는 고개이다. 황골과 기와집말을 연결하는 지름길이다. 이 고개 밑에는 작은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데, 이 마을을 "상부고개마을"이라고 한다.
새터말 . 사탄말
영통 독침산 동쪽에 있었던 마을이다. 느티나무골에서 남쪽으로 200m 거리에 위치한 마을로 이천 서씨 묘역이 들어선 마을이다. 주로 해방 후에 이주해 온 사람들이 모여산 동네로, 큰말이나 느티나무골에 비하여 새로 생긴 마을이라서 "새터말" 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사투리로 "사탄말"로도 불린다.
샘말
말통골 건너편 영통 주공5단지 일대에 있었던 작은 마을이다.
샘말 . 천죽(天竹)
신나무실 서쪽에 있었던 마을이다. "샘말"이라는 이름은 곳에 좋은 샘이 있어서 붙여진 것이라 한다. "천죽(天竹)"이라고도 불리는데, 이곳에 있던 샘이 대나무가 쭉 뻗어나듯이 솟구쳐 올랐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라 한다.
샘말고개 . 찬우물고개
황골에서 큰말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영통사가 고개에 위치하고 있으며, 청명산 약수터로 올라가는 입구이다. 이곳에는 예로부터 차고 좋은 우물이 있었다고 하며, "찬우물 고개"라는 이름도 이에서 연유한 것이라 한다. 현재도 영통사의 우물과 같은 좋은 우물이 남아있다.
손실(孫室)
경희대학교 수원캠퍼스 정문에서 약 500m 정도에 있었던 마을이다. 손씨(孫氏)들이 살던 곳이어서 "손실"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이 곳에서 전해지는 다음의 이야기도 손씨와 관련된 것이다. 손실에 사는 손씨들은 상당한 부자였다고 한다. 이곳에 커다란 기와집을 짓고 근처의 땅에 소작을 주어 경영하던 부자였지만, 인심은 아주 고약했다. 하루는 지나가던 스님이 시주를 부탁했는데, 손씨 집안에서 고작 쌀 한되만을 내놓았다. 스님을 이를 괘씸히 여겨, 더욱 잘살게 되는 비법을 알려주겠다고 하면서, 서천리와 통하는 말티고개를 낮추면 더욱 큰 부자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손씨 집안에서는 그 고개를 깎아 길을 넓히고 높이도 낮추었다. 그런데 고개의 높이를 낮추고 길을 넓히자, 재물이 오히려 많이 나가게 되었다. 그래서 손씨들은 얼마가지 않아서 망하게 되었다. 그들이 살던 터에서는 최근까지 깨진 기와와 생활 도구들이 많이 나와서 이 이야기의 근거를 제공해 주었다고 전한다.
쑥고개
손실 남쪽에 있는 고개이다. 현재 경희대학교 수원캠퍼스에서 금융연수원 근처에 있다. 손실마을 사람들과 신나무실 마을 사람들이 많이 넘나들던 고개였으며, 예전에는 초등학교 소풍 장소로도 많이 이용되던 곳이라고 한다.
안영통 . 내영통(內靈通)
구렁굴 고개 황골지역에 위치했던 마을이다. "안영통" 혹은 "내영통"이라는 이름은 이곳이 1914년 행정구역개편 전에는 영통리 지역에 포함되었다가, 개편 후에 황곡 지역으로 다시 바뀌면서 영통리의 안에 있었다는 의미에서 부르기 시작한 것이라 한다.
양지말
영통 황골마을에 있는 마을이다. 응달말 동쪽에 있다. 양지바른 마을이라 해서 "양지말"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여우 우물
독침산 북쪽에 위치한 샘물이다. 은행나무골에서 신리로 가는 옆에 샘이 있다. 수량은 많지 않고 졸졸 흐르는 정도이다. "여우 우물"이라는 이름은 이곳에 살던 여우와 늑대들이 이 샘에서 물을 마셨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라 전해진다. 이와는 달리, 이 샘에서 나오는 물의 양이 마치 여우가 오줌누는 것처럼 조금씩 나온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옻고개 . 옥고개
영통 1049-2번지 근처에 있으며, 신명초등학교에서 금융연수원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예전에는 영통지역과 용인군 하갈리를 연결하는 고개였다. 근처에 옻나무가 자생하고 있어서 "옻고개"란 이름이 붙었고, "옥고개"란 이름은 옻고개가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고갯길은 1954년 신갈저수지가 만들어지기 이전에는 그곳에 있었던 옹기점들이 물건을 수원으로 내다 팔러가는 지름길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서낭당도 이 고개에 있었다고 한다.
옻우물
독침산 북쪽의 가운데에 있었던 우물이었다. 논 가운데서 물이 솟아났다는 특이한 우물이었다. 15여년 전에 삼성생명에서 노인복지회관 건립을 위하여 논을 메꾸어 지금은 없어졌다.
웃말 . 동산말
신나무실 남서쪽에 있었던 마을이다. "웃말"이라는 이름은 신나무실 사람들이 자기 동네보다 위에 있다고 해서 붙인 것이라 한다. "동삿말"이라고도 불린다.
영통 . 염통
"영통"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신령스러운 것과의 연관을 드러내는 여러 이야기가 전한다. 우선, 영(靈)이 통(通)한다"고 하여 영통이라고 하였다는 단편적이면서도 직접적인 이야기가 있다. 또한 안영통에서 뒷골로 넘어가는 구렁굴 고개에서 백발이 성성한 노인을 이곳에 살던 만신이 밤낮으로 보았다. 그런데 이 노인은 나타났다가도 금방 사라지고, 보였다가 없어지기도 하여 동네사람들 모두가 산신령이 나와서 돌아다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산신령이 통한다는 의미에서 영통이라 이름을 붙였다고도 한다. 청명산 정상에 있었던 절에 고려시대 보물이 묻혀 있었는데, 그 보물이 영험스러운 물건이라 신령스러운 기운이 감돌아 영통이라 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영통은 "염통"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지형이 염통처럼 생겼다는 데서 유래한 것이다.
은행나무골
영통에 있었던 마을로, 독침산 북동쪽에 있다. 500여년전에 이곳에 정착한 사람들이 은행나무를 많이 심었던 이류로 "은행나무골"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소방서와 경찰청 그리고 삼익아파트와 벽산아파트 등이 들어서 있다.
응달말
황골에 속한 마을로 청명산 북서쪽에 있었다. 북서쪽에 위치한 관계로 햇볕이 적게 비추어지는 탓에 "응달말"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양지말 반대편 마을에 해당한다.
응짓말
신나무실의 북쪽에 있었던 마을이다. 양지말 사람들이 붙인 마을 이름으로, 자신들의 동네보다 햇빛이 적게든다고 해서 붙인 것이다. 실제로 마을은 신나무실의 얕은 구릉에 가려 다른 곳보다 햇볕이 적게 드는 지형을 가지고 있다.
절골
청명산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반야사 뒤쪽에 있다. 옛날 골짜기에 절이 있었다고 해서 "절골"이라 불린다고 한다.
절터
청명산 서쪽 절골에 있었던 절의 터이다. 현재 절의 자취는 남아있지 않지만, 청명산 정상에서 신갈쪽 경사면에 널찍한 터가 남아있다. 절은 황룡사라고 전해지는데, 조선 초기의 것으로 보이는 기와 조각들이 다량으로 발견되었다. 아마 이 지역에 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터 옆에는 직경 1m, 깊이 2m 가량의 구덩이가 있는데, 아마 절에서 사용하던 우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의 우물
청명산 서쪽 절터에 있었던 우물이다. 흔히 청명산 약수터를 "중의 우물"이라 하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중이 판 우물이라고 해서 중의 우물이라고 불린다는 이야기로 보건대, 이 우물은 현재의 청명산 약수터와는 반대편에 위치한 절터에 있었던 우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실제 청명산 정상에서 신갈쪽 경사면에는 널직한 절터가 있으며, 그 옆에는 직경 1m 내외, 깊이 2m 정도의 구덩이가 보인다. 이것이 아마 중의 우물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추론컨대, 절이 없어진 후 마을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지면서 반대편에 있는 지금의 청명산 약수터를 중의 우물이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청명골 . 청명마을
영통 960번지에서 1046번지 일대에 있었던 마을이다. 청명산 아래(서쪽)에 있다. "청명골", "청명마을" 등으로 불리는 마을 이름은 청명산(淸明山)에서 유래한 것으로, 청명산 가까이에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현재는 동신아파트, 대우아파트 등의 아파트 단지가 형성되어 있다.
청명산 약수터
청명산 정상부에 위치한 약수터이다. 일반적으로 중의 우물로 알려져 있으나, 절터와는 반대편에 위치하고 있어 전혀 다른 것으로 생각된다.
큰말
본래 영통이 생겼을 때부터 이곳에 사람들이 살았던 오래된 마을이다. 영통사와 반야사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큰말"이라는 이름은 영통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것이라 한다.
큰황골
영통 1058번지 일대와 기흥읍 영덕리 일대에 있는 마을이다. 황골 서쪽에 있다. 천석꾼 이었던 경주 김씨 집안이 살았던 마을이라고 전해진다. 현재는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어, 옛 마을의 지취가 거의 사라지고 있다.
큰황골산 . 능골산 . 태능산
황골의 뒷산으로, 청명산 정상에서 북서쪽에 위치한 높이 112m의 산이다. "황골"이라는 마을 이름도 이 산의 형상이 봉황의 형상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황골 . 황곡(凰谷 또는 黃谷)
청명산 동쪽에 있었던 마을이다. 인근 개의 작은 마을들 대부분이 "황골" 또는 "황곡"이라는 공통된 이름으로 불리는 동시에, 각각 고유한 이름이 따로 있어 주의를 요한다. 황골 또는 황곡은 일종의 대지명(大地名)이고 작은 마을들의 고유 이름은 소지명(小地名)으로 이해하면 좋을 듯하다. 이 마을의 이름은 마을 지형이 큰 봉황(鳳凰)이 앉아있는 형상이라 하여 붙여진 것이라 한다. 지형상 고속도로 진입로를 사이에 두고 있는 샘말이 봉(鳳)에 해당한다고 한다. 현재 이 마을은 주공아파트, 벽산아파트등의 아파트단지가 형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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